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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보는 한국

부익부 빈익빈에 관한 고민 - 1

부익부 빈익빈은 반드시 나쁜 현상일까? 부익부 빈익빈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바라지는 않더라도 비난할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개념은 개인의 사유재산을 축적할 권리를 인정하는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아니 자본주의를 논하기 이전에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부익부 빈익빈이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쪽에서는 이것이 기회의 평등을 뺏기에 사회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다같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에 대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에서는 다같이 비슷하게 나누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아예 사유재산을 없애자는 공산주의는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개인이 갖고 싶은 것을 최대한 추구할 자유를 가진 사회를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에서는 공공선이라는 개념 아래에서 사적인 권리를 속박하는 사회주의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사회주의에서는 개인의 권리 추구가 승자와 패자를 확연하게 갈라버리게 만드는 자본주의를 비정한 것으로 바라보고 자유보다는 평등한 사회가 인간에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요컨데 자유냐 평등이냐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근본적인 물음을 한번 던져본다. 과연 인간은 모두다 같을 수 있는가? 평등주의

이념은 정당한가? 나의 결론을 말하자면 인간은 모두다 같을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이 서로 같지

않은데 모두 같은 존재로 다루려는 공산주의는 매우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사회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격차와 그로 인해 빚어지게 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부정하려고 하는 사회주의를 비현실적인 사상이고 이것은 오직 다수결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대중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수가 옳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다수결의 원칙은 의견을 판가름함에 있어서 대체로 정당하지만 다수결이라고 해서 언제나 윤리적이지는 않고 또한 언제나 사실이나 진리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소수의 권리에 대해서는 눈감아버리는 집단 이기주의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다수결의 원칙이고 대중주의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정신 이래로 사람은 누구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강한 한국에서는 나와 다른 이와의 격차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정서가 강하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갖는 것보다 많이 가지는 사람, 또는 두드러지게 잘난 사람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부정적인 시선을 갖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표현 중에서 엄친아에 대해 열폭한다는 표현이 있다.

엄친아라는 말은 엄마 친구 아들로서 나와 별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두드러지게 잘나고 완벽한 사람을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사람을 보면서 열등감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왜 친구도 아니고 잘 알지도 못하는 엄마 친구 아들을 보면서 열등감에 휩싸일까? 그것은 남과 내가 크게 다를 바가 없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현실은 크게 다르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믿을 수록 내지는 신념화할 수록 현실에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보는 것과 믿는 것이 다를 때, 심리적으로 혼란에 빠지는 것을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에서 빚어지는 심리라고 한다. 통계의 개념을 따르자면 평균과 편차가 존재하는 모든 사건들 가운데서 특이하게 두드러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편차가 발생하는 모든 경우는 종의 모양을 가진 정규분포곡선의 형태로 평범한 다수와 특이한 소수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이것을 인간 사이에 적용하자면 잘난 소수는 일정한 확률로 평범한 다수 사이에 섞여있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소수의 잘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통계의 진실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나와 달리 선택받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 엄마 친구 아들은 얼마든지 가능한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 갖는 지나친 열등감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사소한 꼬투리라도 찾으려고 하고 그러면서 신은 공평하구나하며 자기 위안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일까? 그들은 사람은 처음부터 모두가 똑같아야 하고 똑같다고 믿는 정서를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애초부터 인간은 모두가 제각각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와 다른 존재를 보면서 존재의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나와 다른 존재가 나의 사고관에 아무런 충격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나 생각이 사회적으로 발생한 격차의 원인(이른바 빈부격차와 같은)을 제거한다면 모두 같고 모든 이의 행복이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이질적인 존재는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온다. 인간이 모두 같다고 믿는 사람에게 나와 다른 존재는 인지부조화를 낳는 것이다.


나보다 우리를 앞세우는 한국인의 정서. 거기에다 남과 나를 비교하기 좋아하고 남의 시선에 민감한 의식 구조는 한국인들이 사람 간의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촉매제 구실을 하는 지 모른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말이 한국에서는 오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기회의 평등이란 모두가 공평하게 경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경쟁에 참여하는 자들의 출발선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누구는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할 수 있고 누구는 보다 불리한 위치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이것은 완벽한 공산주의 평등 사회가 아닌 이상 사람사는 어디서나 빚어지는 일이다. 승리를 다툼에 있어 누구는 보다 유리하고 누구는 보다 핸디캡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기회의 평등이라는 원칙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온전한 기회의 평등이 가능한 곳은 결과의 평등이 가능한 곳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경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평등 사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