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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보는 한국

한국인의 '정'이란 무엇일까?

정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국 사람은 정이 많고 서양인들이나 일본인들은 정이 없다는 류의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 간다. 이 정이란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난 정이란 것을 가족적이고 감정적인 소통체계라고 본다. 남보다는 가족에 가까운 끈끈하고 끈적거리는 관계. 상호 간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는 관계. 관심이 때로는 간섭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관계.

친밀한 관계라는 것은 서로 보다 깊숙히 알고 비밀도 주고 받는 관계다. 허물이 없는 사이라는 말을 한다. 이런 허물없는 친밀함은 그와 나 사이에 프라이버시의 벽이 종종 사라지게 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는 것을 그는 내가 정이 없다고 툴툴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진실로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충고를 내게 할 때, 내가 거부감을 느껴도 참고 묵묵히 들어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서양인이나 일본인들은 그런 정이라는 것이 없다. 살갑게 다가서고 끈끈하게 맺어지며 서로 챙겨주는 그런 관계말이다. 내가 오늘 어떤 일을 그에게 해주면 그는 진정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그 다음 날 나와 그 사이가 뭔가 달라졌다는 기대는 하기 어렵다. 당황스럽지만 나의 눈으로는 그는 별로 감동받지 않은 듯하다. 한국처럼 술 한잔 같이 나누었다고 갑자기 친구가 되는 일은 없다. 그들은 상대방의 일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한다.

반대의 상황을 보자. 내가 오늘 그에게 안 좋은 실수를 하나 했다고 하자. 그것에 너무 고민할 필요도 없다. 다음날 그의 태도가 갑자기 차가와지지도 않는다.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하루가 시작된다. 그들은 상대의 잘못에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로 생각할 때 납득이 가는 실수면 이해한다. 당신의 존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실수에 대해 마음으로 상처를 받지도 않는 것이다. 기대가 크면 상처가 크고 마음을 주면 더 상처받기 쉽다고 하던가. 서양인들은 기대도 없고 마음도 주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들은 서로 간에 머리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은 하지 않는다. 머리로 생각할 때, 난처한 제안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가슴으로 주고 받는 정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서양인들은 직장 동료들 간에도 사적인 유대감이 많지 않다. 어느 누구하고도 필요가 없으면, 또는 충분한 동기가 없다면 친분을 맺지 않는다.

 

서양인들은 낯선 타인과 친구를 대하는 방식이 그다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생판 모르는 사람하고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잘 주고 받는다. 친구라고 해서 특별한 밀착감을 형성하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남과 우리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서양인들에게 남이나 친구나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친구처럼 만날 수 있고 대신에 어떤 친구도 낯선 이들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부등호식을 그리자면 (한국인에게 모르는 사람<<미국인에게 모르는 사람=한국인에게 평범한 친구<미국인에게 친구<<한국인에게 친한 친구) 이와 같은 관계를 가정해볼 수 있다. 한국인의 친한 친구와 같은 것은 미국인에게는 가족이다. 미국에서는, 카운셀링과 같은 가족이 나누는 부담을, 한국에서는 친구들과 나누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한국에서보다 낯선 타인들에게 친근하다. 익명의 관계라도 예의가 바르다. 대신에 친구 사이는 우리랑 비교했을때 밋밋하고 살갑지 않다. 우리처럼 끈끈하게 뭉치는 기회가 드물다.

살갑고 돈독한, 그야말로 이 넘치는 관계를 주위에 두고 싶다면 미국보다는 한국이 바람직한 선택이다. 특별하게 뭉치는 친구없이 지내도 상관은 없지만,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누구에게나 매너있고 낯선 이들도 남남처럼 느껴지지 않는 사회를 원한다면 한국보다는 미국이 살기 좋은 나라로 여겨질 것이다.

 

정이란 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이고 장단점이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정확한 거래와 일처리에는 바람직하지 않고 가족같은 끈끈함에는 중요하다. 한국이 정이 많은 사회라는 것은 가족개념의 인간관계가 보다 바람직한 사회 규범으로 오랫동안 통해 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정이 넘치는 사이의 좋은 점이야 사람 사는 것 같은 그 끈끈하고 훈훈함이고 모두가 잘 아는 것일테니 여기서는 정의 폐단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정으로 빚어지는 안좋은 사례는 아무래도 거래에서 종종 일어나는 비합리성이 될 것이다. 사적인 친분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관계나 사업은 허점이 많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갑돌이가 갑순이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갑순이에게 서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선물을 주었다. 그 선물을 받은 갑순이는 당황스럽기는 하였으나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마움을 표시하며 언젠가 답례하겠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돌이는 갑순이더러 자기가 필요한 것을 부탁했다. 갑순이는 당황스러웠다. 갑돌이는 아주 비합리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부탁한 것은 지난 번에 갑순이에게 주었던 것과 비슷한 가격을 가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갑순이가 받았던 것은 반드시 갑순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갑순이는 뭔가 손해를 보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돈을 주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산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갑돌이는 정을 이야기하고 친분을 이야기하면서 두리뭉실 그녀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했다. 이와 같은 사례가 사적인 친분과 인간적인 정을 앞세우는 곳에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정확한 계산을 바탕으로 상호간에 충분한 이해와 동의를 구하고서 합의를 얻어내는 계약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믿음에만 의지하는 그런 계약은 머리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테이블에서의 협상이 아니라 술자리의 접대 후에 맺는 계약과도 같은데 이것은 뭔가 알 수 없는 상호 채무를 지는 기분을 들게 한다.

 

비단 사업과 거래에서만 정이란 것이 폐단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매우 소소한 친분 관계에서도 위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진다. 친구가 되자면서 술 한잔을 나누자던 그가 이제 친구가 되었다고 여러 부탁을 요청하는 일과 같고, 그가 필요할 때마다 나를 부르는 것과도 같다. 술자리의 계산은 그가 더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술을 좋아하지만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술자리에서 그가 계산하는 것이 반드시 그가 나를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는 원하는 술을 마시고 나에게 필요한 부탁을 하였으나 나는 그다지 술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부탁은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 아니냐며 다가오는 그를 마다하기란 더욱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가진 네트워크를 무시할 경우 내게 불이익을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이란 것은 일방성을 가지고 강요될 경우 불만을 낳기 쉽다.

 

어느 관계에서나 조금 더 희생하는 편이 있게 되고 조금 더 양보하는 편이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의리를 이야기하고 정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그런 계산같은 것들을 하지 말자고 할 것이다. 머리로 맺는 관계가 아니라 가슴으로 통하는 관계를 맺자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제안들에 순수하게 감동받다가는 눈뜨고 코베이기 쉽다. 상대방이 자신의 의도대로 하는 관계로 말리기 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