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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보는 한국

한국인이 서열에 민감한 이유 - 교육의 문제

[비교의식과 경쟁주의와 서열의식]

한국의 중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 그러나 그것을 한국인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면서 엄청난 댓가를 치루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남과의 비교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과의 비교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비교의식은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나보다 잘난 이는 나의 열등감을 자극한다. 심리적으로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을 위해 넘어서야할 경쟁의 대상이다.

 

다른 이의 시선에 민감한 사람은 주류 사회의 가치관을 개인주의보다 중요하다고 여길 공산이 높다.

집단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획일화된 평가기준을 형성하기 쉽다.

획일화된 잣대를 가진 사람은 사람들을 일렬로 줄세우고 비교하기 쉽다.

 

결국 비교의식과 경쟁주의, 서열의식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집단주의 가치관이고 획일화된 가치관이다. 그리고 집단주의적이고 획일화된 가치관은 한국의 중고등학교를 거치면 갖게되기 쉬운 것이다. 전국민을 줄세우기 좋게 만든, 다양성이 부족한 획일화된 한국의 공교육과 일률적인 평가시스템 때문이다.

내신이건 수능이건 고시건 오로지 시험 점수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시스템, 그것도 객관식 사지선다형으로 답만 찍어서 맞추면 되는 평가 시스템을 가진 한국에서 학교교육을 받게 되면 점수와 등수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것에 익숙해지게 된다.

 

에세이나 논술보다 객관식에 길들여지다 보니 자신의 생각을 주관적으로 정리하는 것보다 피상적으로 답만 찍어대는 버릇을 갖는다. 더 문제되는 것은 어떤 현상이건 반드시 정답이 존재하리란 잠재의식마저 갖는다는 점이다. 객관식에는 100% 답과 나머지 100% 오답이 있을 뿐이다. 80% , 70% 답과 같은 것은 채점 기준에 없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이와 같은가? 정답이 1번이냐 2번이냐와 같은 객관식 문제풀이와 같은 사고 방식에 길들여진 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을 다시 힘들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객관식 중심에는 풀이 과정의 평가도 없다. 그저 100% 답이냐 오답이냐의 흑백논리와 같은 선명한 대칭만이 존재할 뿐이다. 과정이야 어떻건 찍어서라도 맞추면 백점이다. 결과주의가 팽배하는 데 한몫하게 된다.

 

단답형 주관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하나의 현상을 놓고 단순히 한 단어로 문제의 원인을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안타깝다. 자신이 문제를 보는 시각으로부터 타당한 근거들을 가지고 논리를 풀어내어 상대방을 이해하게 하는 논술형 사고 방식은 한국 교육을 이수하는 과정에서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높은 교육열이 어떻게 자랑스러울 수가 있겠는가. 자기 스스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상에 접근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자발적인 생각들을 하는 인재가 아니라 기계적인 정답풀이 도사들만 길러내는 교육이 뭐가 그리 자랑스러울 수가 있겠는가.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이 아니라 시험 잘보는 사람들만 골라내는 교육이면 교육열이 높아봐야 생산적일 수가 없다.

 

어린 학생들은 결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가치관과 세계관을 정립하지 못한다. 주위에서 듣고 보고 배우는 데로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 나간다. 12년 동안 학교에서 놀다가 설사 아무 지식도 얻지 못했을 지라도 긴 시간 학교에 머물렀다는 자체만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 사회는 결국 점수로 사람을 평가하는 구나. 찍어서라도 높은 점수를 받으면 유리하구나.’ 뭐 이외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공부에 동기를 얻게 하도록 평가라는 자극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공부가 그저 취미가 아닌 이상 학습 성취도를 평가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객관적인 성취 기준이 없으면 저마다의 학식은 분별력이 없을 때 중구난방이 되기 싶고 사회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12년 학창 시절동안 자신을 평가하는 평가 기준이 오로지 시험 점수 뿐이라면 이것은 큰 문제를 만들어낸다.

 

학생들은 알게 모르게 점수와 등수에 노이로제가 된다. 인생의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는 중요한 사춘기에 말이다. 모든 결과는 숫자로 환산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야 만다. 심지어는 모든 사람을 점수로 채점하고 등수로 환산한다는 잠재의식을 한국의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알게 모르게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인터넷 게시판에서 보면 잘 볼 수 있다. 바로 비교 서열 놀이다. 인터넷에 보면 사람들이, 특히 학교를 다니거나 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비교 놀이, 서열 놀이를 즐긴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가 아닌 남들을 비교할 때는 재미있어 하다가도 막상 자신이 비교선상에 오르면 발끈하거나 위축되거나 필요이상으로 거만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남들과 비교당하는 것에 그동안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받아왔는 가를 느끼게 한다.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획일화된 사회 분위기, 그리고 남들과의 비교의식에 자주적인 행복감을 희생당한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그러면서도 비교의식을 이미 내재화해 받아들인지라 남들을 비교하는 데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특히 숫자로 드러나는 것에 유독 민감한 것이 한국인이다. , 수능 점수, 연봉, 재산 처럼 숫자로 나타나는 것들에 대해 그렇지 않은 것들보다 훨씬 민감하다. 숫자는 곧 점수라고 보는 것일까? 아무래도 객관적으로 줄세우기 쉬우니까 그런 것이 아닐까한다. 보는 이에 따라 주관적일 수 있는 외모도 퍼센티지로 정의내릴 때 보다 객관적으로 보이고 비교의 실감이 나는 모양이다. 상위 10%, 상위 20% 놀이를 즐긴다. 마치 수능 퍼센티지처럼 말이다. 외모도 이런 식으로 수치화될 때, 보다 강력한 서열화의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성형 공화국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모든 일들은 개성없이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된 잣대와 서열의식에서 비롯되며 이것이 사람들 마음에 내재화되는 과정은 점수로만 학생들을 평가하는 학교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었을까? 다양화되고 자율적인 다면적 평가 시스템이 요구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획일화된 교육 시스템은 다양하게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들의 가치관도 중요하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식을 비교하는 발언을 자주 한 부모 밑에서 자라나게 되면 비교 가치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행위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순위로 평가하는 버릇을 지니게 된다. 아니 자기 자신 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