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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보는 한국

인터넷의 집단 광기: 마녀 사냥

마녀 사냥이라는 말을 인터넷에서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원래 마녀 사냥이란 어원은 중세 유럽에 죄없는 여자들에게 마녀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광장에서 거리에서 사람들이 돌팔매질을 하고 몰아세우고, 린치를 가하며 자백을 강요하다가 불태워 죽이는 일에서 나왔습니다. 일종의 집단 광기입니다. 그리고 21세기인 지금에도 익명성의 공간인 인터넷에서 유사한 모습을 종종 떠올리게 됩니다. 감정에 근거하는 여론 재판, 재단의 자리에서 걸러지지 않는 폭력의 행사, 집단 정서에 따라 죄와 벌이 결정되는 방식과 같은 점에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얼굴을 맞대고 일대일 대면을 하는 자리에서 다른 이에게 공격을 가하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비록 상대방이 아주 불쾌하게 굴더라도 말입니다. 왜냐면 일대일로는 잘못 저항했다가 오히려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승산이 없을 수 있기 때문에 과감하게 상대를 비난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기와 비슷한 기분을 가진 자가 하나 둘 계속 모이면 사람들은 과감해집니다. 그리고 그 수의 위력을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마치 들개처럼 용감해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빨을 들이대고 숨겼던 공격성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뒤에 같은 편이 많이 모였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안전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론만 따르면 무슨 짓을 해도 보호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누군가가 광장에서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지나가는 사람은 왜 사람들이 그에게 돌팔매질을 하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가 돌맞을 짓을 해서 돌을 던지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나가던 사람도 바닥의 짱돌을 집어서 그 사람에게 하나 던질지 모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 지 알고나서 분노의 감정을 견디지 못해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 돌을 던지기에 아무 부담없는 마음으로 그저 돌을 던져보고 싶어서 던질 수도 있습니다. 또는 피 안에 잠재된 공격성을 만족시킬 기회를 찾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그저 가벼운 돌만 던지도록 허용이 되었는데도 어디선가 묵직한 돌덩이를 집어와서 머리통을 찍어버리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때 큰 돌에 맞아서 왜 허락되지 않은 큰 돌을 던지냐고 돌던진 이를 저주하려 한다면 그는 오히려 군중을 더 성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어나갈 수도 있습니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집단으로 행동하게 될 때, 보다 잔인해지고 공격적이 되며 보다 비열해지기 쉬운 이유는 익명성의 보호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돌을 던지면 그 던진 사람은 타겟이 됩니다. 그러나 여럿이 한꺼번에 던지면 누가 무슨 돌을 던졌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노출의 부담을 버리고 마음껏 가학적이 될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상대가 큰 상처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도 되니까 죄의식이나 양심의 부담도 없습니다. 몰려다니는 군중은 곧잘 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처벌은 부담스럽습니다.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결과가 잘못으로 드러나면 책임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럿이 모여서 진행되는 처벌에는 상대에게 고통을 준다는 부담감이 없는 것입니다. 돌을 던지고도 내 돌이 상대를 맞추었는 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건 조용히 묻어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중세의 마녀사냥과 같은 일들이 현재의 인터넷에서도 종종 재현됩니다. 인터넷은 본질상 익명성의 광장이기에 마녀사냥이 일어날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여럿이 함께하게 될 때, 종종 도를 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비난에 동참하게 되면 평소에는 발붙일 수 없었던 과격한 발언들과 수위조절이 안된 인신공격이 쏟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야만성은 가끔은 놀랍게도 정의와 상식과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되는 것을 봅니다. ‘돌을 맞는 자는 돌을 맞을 짓을 했기 때문에 돌을 맞는 것이다. 내 똘끼를 말리지 말라.’ 이런 논리가 펼쳐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정한 재판이 아니라 광장에서 재현되는 마녀 사냥과 닮은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 이는 자신을 방어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성난 군중에 의해 집단적인 린치를 당하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개중에는 정말 돌을 맞고 머리가 깨지는 꼴을 겪어도 시원치 않은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돌을 던지는 자들이 모두 정의롭고 합리적인 심판관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군중은 그저 군중입니다. 비난을 하더라도 규정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오해와 판단 미스를 최대한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장에서 마녀 사냥을 할 때는 합리적인 사고는 설 자리를 잃고 맙니다. 누가 소리치면 그 소리에 흥분한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사실 작은 실수였을 수도 있는데 돌이 쏟아지고, 돌에 맞아 비명을 지르는 이를 변호하고 싶어도 자기도 돌맞을까봐 두려워 숨을 죽이고 아무 소리도 못하고 맙니다.

 

군중에 의한 린치를 보고 그래도 처벌받지 않는 야만적인 모습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대해 씁쓸함과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리고 대세가 쏠리면 그에 감히 거스르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얼마든지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하고 조심합니다. 희생양이 나타나서 쓰러질 지라도 감히 저항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대 다수의 싸움에서 다수가 익명성의 가면아래 숨어 얼마나 비겁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같은 편이라 생각되면 비열한 행위도 집단 이익을 위해 보호해 주려고 합니다. 자기가 보기에도 역겨워 보여도 엄호해 주지 않으면 같은 편을 잃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같은 편을 계속 잃다보면 세를 잃어버리고 자기가 오히려 소수로 몰려서 군중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요.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야만성에 자신도 희생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로 둔갑하면 중립적이고 객관적이 될 여유는 사라지고 맙니다.

 

인터넷에서 여론 몰이로 한 사람을 집단 린치하는 것에 즐겨 참여했던 사람일 수록 더더욱 그 무서움을 잘 알기에 집단 정서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군중 속에 무리지어 다니다 보면 분위기 파악하는 눈치만 늡니다. 그리고 익명성 가운데서 가학적인 성향을 나누면서 함께 희생의 제물을 바치는 카니발의 쾌감을 누립니다. 이런 일이 그저 온라인에만 머무는 일이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잔인한 인간성은 오프라인까지 피를 보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신상 공개와 같은 것이 그러한 일입니다.

 

이런 마녀 사냥의 잔인한 린치를 줄여나갈 수 있는 길은 하나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과 다툼을 벌일 때, 그에 함부로 참견하지 않는 것입니다. 충분히 변론할 기회를 주려면 일대다수의 난전이 벌어지면 안됩니다. 일대다수의 설전이 벌어지면 혼자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아무리 납득할 만한 논거를 가지고 있어도 말입니다. 타이슨도 효도르도 집단 다구리에는 견디지 못합니다.

 

비록 한쪽이 맞다 여겨질 지라도 하나둘씩 한 목소리로 한편만 거들기 시작하면 지적에서 훈계로, 훈계에서 매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매도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때다 하며 꼬여듭니다. 그들이 마음껏 폭력을 저지르는 행위를 보고도 분위기상 말릴 수 없게 된다면 이미 당신은 집단 린치의 방관자가 된 것입니다. 비록 당신의 첫 지적이 의분강개함에서 출발했을 지라도 말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안전이나 이익 앞에 양심을 숨기고, 두려움에 굴복하고 타협하는 것은 정말 순간입니다. 남을 비난하는 것은 쉬워도 자신이 떳떳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집단은 나의 편일 때는 한없이 든든하지만 군중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을 때는 거대한 공포로 다가옵니다. 일개 개인은 군중에게 항변하고 대항하고 저항할 겨를도 없이 무참하게 난도질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군중 속에서 그 거대한 힘 앞에서 혼자만의 목소리를 유지하기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침묵하게 되고 방관하게 됩니다. 성난 군중, 흥분한 군중이 이성을 상실한 모습을 보면서 뒤늦게 위험을 깨달을 지라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기제가 군중심리 사이에 작용하기에 전 집단 군중 심리를 자극하는 류의 감정적인 구호에 기반한 선동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선동은 결코 이성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고 반드시 폭력이나 비합리적인 일들을 부르고야 만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학급이 있습니다. 어느 학생이 정신 박약한 짓을 하고 스스로 행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합니다. 그런 그를 불쾌하게 여기는 학생들이 늘어납니다. 그러자 그를 괴롭히는 학생들이 나타납니다. 학급의 학생들은 린치를 당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일면 고소하다고 느낍니다. 그가 그렇게 해서라도 정신을 차리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학생은 생각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의가 아니라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는 교정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겁먹은 그의 모습을 보면서 불량배들은 더 괴롭힙니다. 그의 친구가 되어주는 이가 없기에 괴롭혀도 부담이 없습니다. 그를 비우호적으로 보았던 교실의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그의 편이 되는 것은 또다른 이지메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수의 침묵 속에서 잔인한 녀석들은 폭력을 마음껏 즐기게 됩니다. 그에 대한 폭행은, 그 이전의 그 학생의 바보같은 짓들로 인한 집단 신망 상실이라는 이유때문에, 실수에 비해 과도한 폭행일지라도 정당화되고 비호되기도 합니다. 한 학생에게 벌어지는 심한 집단 린치는 대개 그 린치당하는 사람을 아무도 편들어 주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단 몇 사람이라도 불량배들의 행동을 경고하고 나섰다면 그렇게 일이 심하게 진행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인터넷에서 나타나는 여론 재판은 위에 묘사한 것보다 더 광기스러울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아는 사람에게 저지르는 일도 군중 심리 속에서 심해지기 쉬운데, 익명성의 보장을 받으면서 저지르는 일은 그 얼마나 본능에 충실하기 쉽겠습니까. 모든 일탈이 익명성 아래에서 가능한 것이 두구라의 바다 인터넷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