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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이슈와 의식

임금 현실화라는 주장과 그에 대한 생각

임금 현실화라는 주장을 보게 된다. 자신의 임금을 올려 달라는 이야기다. 임금 인상은 생산성 향상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다른 쪽의 임금을 하향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임금 인상이 경제적인 요인에서 계산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요구로 되는 것이면 문제가 된다.

 

국가의 총 생산량을 GDP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인구로 나눈 것이 일인당 GDP. GDP는 모든 국민이 1년간 만들어낸 가치의 총합이다. 우리의 국민소득이 2만 달러인 것은 우리가 일인당 창출해낸 생산량 또는 가치가 2만 달러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국민이 일인당 평균 2만 달러를 나누어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이 2만 달러 대신에 3만 달러를 달라고 한다면 다른 어느 누군가는 1만 달러만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산량의 증가없이 임금을 더 달라는 것은 결국 다른 이의 몫을 내게 더 달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만약에 임금을 올려서 생산성이 증가한다면 그 임금 인상은 결과적으로 자기가 받을 수 있는 몫을 받은 것이니 문제가 없다. 다른 이들의 실질 소득을 깎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을 올린 후 생산성이 향상될 지 안될 지는 함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임금 인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생산성의 향상 이후에 그에 걸맞는 임금을 더 받는 것이다. ‘먼저 임금부터 올려라 그러면 생산성도 따라 오를 것이라는 주장은 개연성은 있으되 논리적 필연성은 없다. 그러므로 채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이는 비유하자면 프로 야구 선수가 연봉을 많이 받으면 다음해 높은 성적으로 보답하겠다는 주장과 같다. 이런 식으로 연봉 산정을 하는 집단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높은 실적에 대한 보답으로 보상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임금 인상 요구라는 것은 내가 이전보다 더 많이 생산해 낸 댓가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다. 생산성에 기여없이 임금만 더 달라고 하는 것은 다른 이의 실질 소득을 감소시킨다.

그래서 다른 쪽에서 한 쪽의 임금 인상을 납득하지 못할 경우 연쇄 인상 요구가 일어난다. 여기도 현실화, 저기도 현실화. 중국집도 현실화, 교통비도 현실화, 슈퍼마켓도 현실화, 학원비도 현실화, 그러면 결국 물가만 오르고 화폐가치가 하락함으로써 모두가 명목상 임금이 올랐으되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이득이 없게 되는 것이다. 만들어내는 파이의 크기는 똑같은데 가격만 오르면 예전보다 비싼 가격으로 똑같은 양을 먹는 것이 되는 것이다. 100원을 벌어서 100원짜리 파이를 먹는 거나 1000원을 벌어서 1000으로 가격만 오른 100원짜리를 먹는 거나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의 임금 인상 요구에 대해서 다른 사회 구성원들은 합리적으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H자동차에서 임금을 인상한다고 하자. 한해 동안 H자동차가 벌어놓은 수익이 10억이라고 예를 들자. H자동차는 주식 회사이므로 주식을 가진 주주들에게 일정 수익 이상의 수익률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가는 하락하고 회사는 부도위기에 빠질 것이다. 종업원의 임금 인상이 생산성 향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임금 인상은 H자동차의 비용 증가와 수익 악화와 연결된다. 그러면 회사 측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다. 자재나 납품업체 쪽에서 코스트를 줄이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H자동차의 비합리적인 임금인상은 다른 쪽의 희생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물론 H자동차가 기대 이상의 수익을 얻어서 주주의 기대치를 만족시키고도 남을 경우 임금 인상으로 연결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임금이라는 올리기는 쉬워도 내리기는 어렵다. 사람들의 심리가 하락에는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큰 예상치 않았던 순이익의 증가에는 보너스(특별 상여금) 형식으로 댓가를 지불하고 회계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지금까지 언제 임금 인상 요구가 합리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 지에 대한 설명을 한 것 같다. 자신이 맡은 일에서의 생산성이 증가한 만큼 (파이를 증가시킨 만큼)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몫을 누리는 길이다.

 

그런데 이와 다른 방식의 임금 투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쪽에서의 주장은 자신이 자신이 일한 만큼 받고 있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산성이 실제보다 저평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국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다른 이들이 받는 임금과 비교할 때, 실질적으로 저평가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재평가된 기준으로 임금 인상을 얻을 경우 다른 이들은 상대적인 손해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그 손해는 사실 그동안에 누려왔던 과잉 이익이 정상적인 이익으로 바뀐 것이더라도 말이다. 여하튼 어느 한 쪽의 임금 인상 요구에 대해서 그 인상 요구가 불합리한 것을 합리적으로 시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나친 요구인지 국민들은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임금 인상 요구를 수호하는 것이 결국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어느 한 쪽의 합리적이지 않은 요구는 다른 이들에게 경제적인 피해를 끼친다. 내가 데모할 권리를 위해 네가 데모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식의 생각은 거시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단견에 불과하다. 무작정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대기업 노조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나마 대기업이니까 데모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 하청을 맡은 조그마한 회사에서 문닫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누가 데모할 꿈이나 꾸겠는가. 너도 억울하면 데모하라고 하는 일부의 주장은 그야말로 현실을 무시하는 억지일 뿐이다. 대기업 노조의 불합리한 연봉인상은 하청업체의 파이를 뺏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하청업체의 직원들은 앉아서 대기업 직원과의 벌어지는 임금격차를 고스란히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높은 수익을 올리려면 높은 생산을 해야 한다. 그것이 경제의 ABC. 아프리카나 중남미, 중국이나 인도 같은 빈국에서 한국을 보라며 임금을 한국만큼 달라, 현실화하라고 주장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나라들이 가진 파이가 작으니까 그것을 나누려면 작은 몫이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인 나라에서 경제적인 삶의 수준을 이야기할 때는 유럽이나 미국처럼 4만 달러를 기준으로 잡고 이야기 하면 그것도 말이 안되는 것이다. 지금의 생산성을 가지고 유럽수준으로 살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린애 떼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국민 일인당 평균 수익이 맞냐 틀리냐를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일 뿐이다.

 

진정으로 검토되어야 하는 것은 노동 시장의 임금 산정이 왜곡되어 있는가 아니면 합리적으로 운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분야별, 부분별, 업종별 임금 산정이 그들이 사회에 가치를 창출해 내는 만큼 적절한 수준인가를 문제로 검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면 일부 부분에서는 강력한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왜곡되게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부분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므로, 시장의 원리에 맞게 필요한 만큼 자율적인 수준으로 되돌아가도록 시정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있다. 왜 사장님은 10억을 받고 나는 2천만원만 받는가? 왜 부장은 1억을 받는데 나는 3천인가?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불합리한 것인지는 정말 객관적인 눈으로 봐야지 자신의 입장에서만 봐서는 안된다. 1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사장이 있다. 이 사람은 1억을 벌고 나머지 종업원은 평균 2천을 받는 다고 하자. 불만을 품고 연봉 조정을 하려고 한다고 하자. 사장님은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내가 이 사업에 뛰어들 때, 사업의 성공율은 10%였네. 다시 말해 뛰어든 열명 중에서 나 하나만 성공한 것이고 나머지는 부도가 났고 일부는 빛때문에 전 재산을 탕진했네. 나도 내 전 재산을 걸고 사업을 했고 운좋게 성공했네. 그래서 지금 1억을 버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사업에 뛰어들 당시 기대할 수 있었던 기대 수익은 자네들이 갖는 기대 수익보다 훨씬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네.

후하게 쳐서 망해도 재산을 잃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보세. 내가 1억을 벌 확률은 10%니까 내 기대 수익은 천만원일세. 자네들의 기대수익은 얼마인가? 입사 순간 보장된 2천만원의 월급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보다 자네들의 기대수익이 두 배나 높은 것 아닌가? 그런데 나보고 돈을 더 달라니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왜 자네는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나? 왜 내 돈이 탐나면서 자네는 사장이 되려고 시도하지 않았나? 망할까봐 두려워서 그런 것 아닌가? 직장이야 짤리면 그만이지만 부도나면 모조리 잃어야 하니까 겁난 것 아닌가? 나도 두려웠네. 그렇지만 난 도전했고 자네는 하지 않았네. 그리고 운좋게 난 성공을 했고 난 내 사업에서 내 지분만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네.

만약에 사업을 해서 성공을 해도 자기 지분을 제대로 보장받지 않는다면 누가 사업을 할까? 누가 미쳤다고 망해서 전 재산 날릴 위험은 있어도 성공해도 수익이 별 차이없는 일을 하려고 할까? 아무도 사업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자네같은 사람들을 고용해서 일자리를 주고 월급을 주겠는가? 사업가들의 기대 수익을 높여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사업에 뛰어들게 하는 것일세. 다시 말해 사업에 보다 많은 투자를 유도하는 일이고 경기가 활발해지는 지름길이 되네. 그래야 자네같은 겁쟁이들에게도 보다 많은 일자리와 이윤이 생기는 것이고.’

 

이번에는 부장의 월급이 안오르는 이유를 보자. 과장이나 부장의 월급 인상폭이 낮은 것은 신입 사원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누어 갖기 때문이다. 부장의 월급이 세지면 신입사원들의 월급이 낮아지게 된다. 총 임금이라는 코스트는 일정액이기 때문이다. 왜 부장의 월급이 생각보다 낮냐면 부장은 노조의 보호 대상 바깥이기 때문이다. 노조에서 과장까지의 지분을 많이 챙기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부장의 지분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규직 임금과 비정규직 임금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왜일까?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몫을 자신이 갖고 있는 파워로 결사 수호하기 때문이다. 회사의 입장에서 비용을 줄이려 하는데 정규직이 양보를 안하면 비정규직에 보다 가혹해질 수 밖에 없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경기의 흐름에 따라 때때로 인원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데 정규직에서 결사반대를 하면 다음부터는 정규직을 더 뽑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설사 경기가 좋아져도 인원 조정이 힘든 정규직으로 많은 사원을 뽑기가 어렵다. 왜냐면 경기는 항상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힘들 때 자를 수 없는 사원이라면 좋을 때라도 뽑기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오바마가 국무총리를 뽑을 때, 힐러리를 선택하는 것을 반대하는 말이 있었다. 그녀가 너무 거물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쉽게 자를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자르기 부담스러운 사람은 뽑기도 어렵다. 관리하기 힘들고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기가 좋아져도 필요 이상의 비정규직을 두게 되는 것이다. 일단 정규직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양보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새로 일자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는 정규직 갖기가 보다 어려워 지는 것이다.

 

하나의 이득은 다른 하나의 손실이다. 이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다. 그러나 그것을 잘모르는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속고 만다. 어떤 노조의 파업이라도 그것은 모든 노동자의 권리 수호를 위한 행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와 같은 노동자들의 노동 삼권의 보장을 위해 다른 이들의 파업을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 물론 경영주의 지나친 횡포를 막기 위해 노동 삼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합리적인 요구일 때만 지지해야 한다. 불합리한 요구일 때는 다른 이들의 이익을 뺏으려는 집단 이기주의의 행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정규직의 파이는 정규직과 대체제 관계고, 과장과 부장의 파이는 신입 사원들과 대체제 관계이며, 대기업 노조와 중소기업 직원들과의 이해 관계는 서로 상충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는 하나이니 무조건 단결하자는 류의 주장은 그야말로 18세기 맑스의 이야기 일뿐이고 20세기 초중반의 미국이나 80년대 초중반의 한국에서 막 노동인권이 일어날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제는 그 안에서도 기득권이 세분화되어 나뉘어져 있다. 정규직을 과잉 보호하는 것은 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비정규직이나 새로 일자리를 얻으려는 사람들에게는 기회 박탈일 뿐이다.

 

세상을 기득권과 피득권, 둘로 단순하게 세상을 나누는 논리에 생각없이 휘말리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자 비합리적인 집단 이기주의에 기꺼이 희생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파업과 집단 행동은 나에게 무조건 선이 아니다. 그것이 합리적인 주장이 아니라면 말이다.

 

불법 노점상의 권리 보호를 위해 그들로 인해 피해를 보는 세금내는 주류 상권의 희생을 못본척 할 수 있는가? 탈세하는 노점상, 세금 내는 가게 주인, 가게에서 일하는 알바생, 국가의 세금으로나 먹고 살 수 있을 노점상 자리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 여기서 누가 가진 자고 누가 못 가진 자며 누가 기득권이고 누가 피기득권인가? 번호를 먹여보면 누가 제일 억울하고 누가 제일 피해를 보며 누구 사정을 먼저 들어주어야 할까. 아마도 사람마다 다 답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득권은 무조건 악, 피기득권의 무조건 선이라는 단순 흑백논리의 시대는 갔다. 누가 더 원칙을 추구하고 합리적인가를 따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