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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이슈와 의식

슈퍼 스타 마이클 잭슨: 그의 아동 성추행은 사실인가 아닌가?

마이클 잭슨, 팝의 황제. 엄청난 음악적 재능과 더불어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온갖 쇼맨쉽과 기행으로 인하여 폭발적으로 대중과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던 쇼 비즈니스의 천재. 그의 음악적 재능에 대해 의문 부호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가 82년 11월에 출반했던 'Thriller'는 빌보드 앨범차트 37주 1위를 기록함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5천만장 이상이 팔린(전 세계적으로 6천만장 이상이 팔렸을 것이라 추정되는) 전 세계를 휩쓸어버린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음반이었다. 그 음반을 통해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최고의 상업적 성공과 더불어 84년 그래미상 7개 부분 석권이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기면서 음악적으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커다란 성취를 맛보았다. 

그는 그 이전에도 잭슨 파이브의 꼬마 싱어로서 이미 스타의 자리에 있었지만 드릴러의 폭풍은 그를 하나의 신화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춤 문워킹은 모든 사람들이 흉내내는 것이 되었다. 그는 단지 음악적으로만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쇼를 창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언제나 매스 미디어를 사로잡았다. 

그의 패션도 문화적 아이콘으로 등극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다이아몬드로 수놓았다는 왼손 흰장갑도 전 세계의 화제였고, 중절모 패션에서 화려한 황태자 패션까지 눈에 띄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대중의 호기심을 사로잡았던 스타가 또 있을까? 70년대의 흑인 슈퍼 스타, 다이아나 로스를 사랑하여 그와 비슷하게 성형을 시도했다는 그의 고백도 보통 사람과 달랐다. 그의 스캔들은 일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의심받을 정도로 유명 인사들하고만 일어났다. 앞서말한 (그가 그의 영혼의 동반자라 고백했던) 다이아나 로스에 이어, 그 당시 최고의 미녀로 꼽혔던 브룩 쉴즈(그가 1984년 광고 촬영에서 화상을 입었을 때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 그리고 세기의 연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둘은 나이를 넘어서 영원한 친구라고 하였다). 화제를 이끌면서도 어느 누구와도 애인 사이로 발전했다는 소식은 없었다. 이 점은 그가 성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냐는 의혹을 일으키게 된다. 초일류 슈퍼스타임에도 그 흔한 애인 하나 없고 오직 침팬지(87년에 17백만 달러를 주고 얻은) 한 마리와 외롭게 '네버랜드'라는 그의 거대한 성에 살았던 마이클 잭슨. 그는 목소리 보호를 위해 여성 호르몬제를 복용한다는 소문이 일었고 그 때문에 그의 곁에 여자가 없다는 루머에 시달렸다. 그의 삶은 의도하였건 그렇지 않았던 간에 언제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 자체가 걸어다니는 스캔들 메이커, 타블로이드 잡지였다. 그는 그 자체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하나의 팝 아이콘이 되었다.

늙지 않기 위해 산소 캡슐에서 잔다는 루머(그는 93년에서야 오프라쇼에서 이 루머를 부인했다), 거대한 성을 짓고 가족없이 산다는 것, 매년 변하는 그의 외모, 제주도를 사겠다는 등의 일반인이 생각하기 힘든 발언들은 그가 평범한 사람들과 너무나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리면서 대중의 호기심을 언제나 이끌었다. (이 외에도 '코끼리 맨'이라 불렸던 사람의 뼈를 샀다는 등(역시 오프라쇼에서 거짓이라 말함), 상상하기 어려운 무수한 화제와 루머를 낳았다.)
여성 호르몬제로 인해 성적으로 무능하다는 루머, 소년 성도착자가 아니냐는 루머가 한창이던 94년 그는 또 한번의 거대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니 그것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와의 결혼이다. 그 이전의 팝 황제였던 엘비스의 딸과 현 시대의 팝 황제인 마이클 잭슨의 결혼은 그가 앞으로 연예계를 떠나더라도 매스미디어가 존재하는 한 그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역사에서 사라질 수 없는 슈퍼스타로 기억될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의 결혼 생활만큼 비밀에 가득차고 세간의 주목을 끄는 이벤트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결혼은 두 번 있었고 상대는 두 번 다 백인이었으며, 두 번 다 오래가지 못했다. 아동 성추행에 관한 재판이 있자마자 진행된 리사와의 결혼은 마이클의 결백을 위해 진행된 비즈니스였다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결혼 전부터 둘의 결혼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세간의 소문이 무섭게 그는 정말 2년 후에 이혼을 한다. 리사는 나중에 자기는 2년 간의 결혼 생활 동안 그와 섹스한 적이 없다, 자기는 마이클을 사랑했지만 불행한 결혼생활이었다는 등의 말을 하며 마이클의 이미지가 기괴하게 변하는 것에 한 몫을 더해 주었다. 
다시 마이클은 데비 로우라는 그의 전직 간호원과 96년에 결혼하고 99년에 이혼하며 그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는데 그들은 피부색 하얀 백인이다. 데비는 그녀의 아이들이 마이클의 아이가 틀림없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혼하면서 결혼 생활과 그와 그의 아이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마이클 잭슨의 음악적 성공은 "Thriller"의 "Thriller"에 의한 "Thriller"를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상대적으로 그 이후의 음반들은 상업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은 불러 일으켰을 지언정 지구가 낳은 최고의 슈퍼스타 마이클 잭슨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수준은 아니었다. 
"Thriller"라는 앨범 단 하나가 지구 문화계에 가져온 충격은 전무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최고의 음반판매량과 최다 음악상 수상과 동시에 그는 84년 LA 올림픽 개회식에서 공연을 하기에 이르른다. 최초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대회로 평가받는 84년 올림픽의 중심에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미국 문화 최고의 엔터테이너가 존재했다. 그는 이어 아프리카의 기아 난민을 위한 구호 활동을 위해 "We are the World"를 공동 작곡하고 다른 팝가수들과 부르면서 다시 한번 슈퍼 스타의 면모를 과시하게 된다. 그 앨범에 그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 노래의 흥행은 반에도 미치지 못했으리라 난 확신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앨범으로 지구를 정복한 마이클 잭슨, 비록 비틀즈가 음악사 적으로 더 높은 위치에 존재하고 더 많은 흥행을 했을 지 모르나 비틀즈는 그 성공과 성취를 위해 10개가 넘는 음반을 내놓은 반면 마이클의 성공은 단 하나의 앨범에 의지한다. 그 이후의 앨범들은 그의 활동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사실이다. 91년도의 "Dangerous"앨범에 담긴 "Hill the World"라는 노래를 통해, 그 이전의 화려한 슈퍼스타의 이미지에서 변신하여 아이들을 사랑하고 평화를 외치는 전도사의 이미지를 덧입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가 존경한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섹시함을 무기로 삼아 슈퍼스타로 군림하던 마이클의 이미지는 아이들의 수호자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엄청난 고난에 시달리게 되니 그것은 아동 성추행 관련 소송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호한다는 그가 알고보니 아동 성도착자 였다? 이러한 뉴스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너무나 극적으로 마이클의 이미지를 추락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 이전의 제왕의 자리로 되돌아 오지 못했다.

소년기와 사춘기가 거세된 채 자라났다는 마이클 본인의 고백처럼, 그리고 그가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았다는 그의 형제 자매의 증언처럼, 부모의 애정을 받고 자라났어야 할 어린 시절 부터 상업적 성공을 위해 희생당한 그의 청소년기는 그에게 심각한 애정결핍을 낳고 그로 인해 그 이후의 기행들을 벌이게 되었는 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피터팬'이라고 했다. 그는 2003년, "
Living With Michael Jackson"이라는 블록버스터 인터뷰를 한다. 그의 역사상 전례없이 그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마틴 바쉬어(Martin Bashir)와의 2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통해 그는 자신을 피터팬이라 부르며 그는 아이들과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성적인 행위 없이)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행위 "the most loving thing to do"라 했지만 이 인터뷰는 대중에게 그의 아동 성취향에 대한 세간의 의문을 보다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결국 이 인터뷰는 2004-5년에 일어난그의 두번째 아동성추행 재판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고 만다. 
2005년의 재판은 그의 두번째 아동성추행에 관한 재판이었다. 그리고 이 재판에서 그는 무죄를 인정받는다. 
그렇지만 그는 93년에 벌어졌던 첫번째 재판에서 그는 판결 직전 2천 2백만불의 합의금을 지급한다. 

조단 챈들러(Jordan Chandler)라는 13살 소년과 그의 아버지는 93년 마이클 잭슨을 아동 성학대죄로 기소한다. 조단은 심리 상담가에 경찰에 한 증언에서 마이클이 그와 키스하고 자위 행위와 오럴을 함께 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이클의 성기에 관한 특징을 자세히 증언했다. 25분간에 걸친 알몸검사를 한 후, 의사는 (증언과 실제 사이에) 상당히 강한 유사점이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there were some strong similarities, but it was not a definitive match.)라는 결론을 내린다. 합의금을 지급한 것이 상황이 반드시 불리했기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실을 감추려는 의도였기보다 다른 정황 때문일 수도 있으니 그것은 마이클이 재판 과정 내내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 악화였다. 마이클 이 재판 과정에서 심리적인 모멸감을 여러 차례 호소했으며 급기야 약물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합의 이후 마이클은 추락한 자신의 명예(미국에서 아동 성학대는 매우 무거운 죄이다)를 회복하기 위해 위에 적었던 바와 같이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이미지 쇄신을 추구한다. 자기가 이상 성심리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리사와의 결혼 발표가 곧바로 이어졌고, 히스토리에 앨범을 통해 섹스 심벌의 이미지를 벗고 구세군의 이미지를 심는다.
그러나 첫번째 재판의 충격은 계속해서 그의 일생을 따라다니고 그를 괴롭힌다. 

그리고 2004년 문제의 두번째 기소가 이루어진다. 개빈(Garvin Arzio)이라는 13살짜리 아이와 손을 잡고 다니고 같은 침대에서 잔다는 2003년의 인터뷰는 전파를 타자마자 그의 비수를 찌르니 개빈은 그를 고소한 것이다. 마이클은 혐의를 부인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같은 그의 친구들이 그를 변호해 준다. 마이클을 검사한 정신 심리학자는 그가 아동 성욕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3백만 달러에 보석을 허락받고, 재판은 1년 반 동안 진행되었고, 마이클은 다시금 약물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 재판 과정 속에서 그의 기행은 또 화제를 모았는데 잠옷을 입은 채로 법정에 늦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2005년 6월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 재판의 결과는 건강과 재정 악화로 결국 마이클의 때이른 죽음으로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시대를 주름잡은 초대형 슈퍼스타의 삶은 마지막 퇴장의 순간까지 미디어의 노출전략과 대중의 관음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팝아이콘으로서의 비상과 활약이 그의 음악성 못지 않게 그의 출중한 쇼맨쉽과 기벽에도 기반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릴린 먼로나 엘비스 프레슬리, 마돈나와 같이 섹시 아이콘으로서의 노출 전략을 짜고 성공을 거둔 이상 그들처럼 불행한 사생활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