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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글쓰기에 대한 작은 생각

글을 쓴지 삼십년이 더 되어가나보다. 난 어렸을 적부터 글쓰기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작문은 내게 참 매력적인 일이었다. 문학도 예술의 하나의 분야라고 하지. 문학이 다른 예술과 다른 점은 學이 붙는 다는 것과 특별한 레슨과 연습의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튼..

 

자유롭게 내 개성을 표현하고 창의성을 발휘하고픈 욕구를 난 글쓰기에서 풀 수 있다.

 

어렸을 적에는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언어를 가지고 이미지를 얼마나 잘 구상해낼 수 있는가 궁리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미지를 정확하게 재생하고 전달하는 영역에는 사진이나 그림이 있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전달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말하자면 내면이나 의식의 표현같은 것들.

 

내러티브(서사)에는 영화라는 대체제가 있다. 문학이 영화와 다른 영역에서 존립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보다 글의 상상력이 보다 무한하다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언어를 가지고 표현을 실험하는 취미는 중고시절까지 계속되었었다.

 

그리고 자의식 과잉으로 병적인 들뜸과 우울함, 존재감 빈곤과 애정결핍같은 괴로움에 시달리던 20대 시절, 나는 현실세계와 유리되어 나만의 세계에 천착했다. 세상을 나의 시각으로 재가공하고 편집했다. 독서와 사색을 통해 관념만으로 이루어진 현실감각없는 나만의 내면의 제국을 이루었고, 난 그 가운데서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외부세계에 조소를 보내면서 혼자 왕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의 세계는 예민했고 외부와의 마찰은 상처를 종종 가져다 주었기에 난 외부와의 교류나 타협보다는 내 내면세계가 보다 순일해지고 완성되어짐을 추구했다. 하지만 주관이란 좁은 편협함에 머무르기 쉬운 한계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비록 나 혼자 완성해 가는 자아의 세계관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게 내 인식 세계의 지평선을 넓히는 것만이 관심사가 되었다.

 

주관에 치우치지 않고 누구에게나 통할 수 있는 객관적 보편성을 얻고자 했다. 비록 지금 세상과 단절되었다 하더라도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은둔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언젠가는 세상을 바꾸리라는 불타는 야망을 가졌었다.

 

세상과의 별다른 교류의 기회없이 독서와 혼자만의 사색을 영원에 가까운 보편성을 추구하고 이룩해 나간다라.. 어떻게 보면 매우 자기 모순적인 명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위대한 지성들은 자기 안의 의식 세계에서 귀한 보석을 발견해 냈고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았는가.

 

어차피 모순이 생존을 위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외부 세계는 법칙과 질서의 관념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에 들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완성하는 관념의 질서가 언젠가 다른 사람들의 정신세계까지 널리 영향을 주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보다 완전한 법칙의 세계로 인간 사회를 진보시키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기 위한 방법론을 연구하기 위해 사상가부터 나폴레옹 히틀러까지 연구했다.

 

그러한 내 꿈을 위해 글쓰기는 매우 중요한 수단임과 동시에 목적이었다. 사고를 정확하게 가다듬고 미세한 표현력을 갖추는데 작문은 큰 도움이 되며 또한 내 생각의 결과물은 글로 남겨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들여 매우 치열하게 글쓰기를 했다. 십년을 넘게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는 외부나 사건의 묘사가 아니라 내 내면의 독백에 치중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어떻게 하면 보다 적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가 내 작문에 있어 관심의 촛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의 흥미를 모으고 관심을 끄는 것은 내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내 가장 깊은 내면의 목소리를 끌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내 내면의 소리에, 그 깊은 가운데서 끌어 올려지는 영혼의 목소리에 내 귀를 기울였다.

 

혼자만의 세계에 자의반 타의반 고립되어 지냈기에 외로왔고 건강을 잃어가는 영혼은 종종 아픔에 시달렸다.

 

힘들고 괴로울 때에 편안할 때보다 난 더 글을 썼다. 마음이 아플 수록 무언가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글쓰기는 아무래도 신경을 쓰는 일이고 즐거운 시절에는 귀찮아 미루게 된다. 하지만 힘든 나날에는 무언가 외치는 내 내면의 호소에 귀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예전과 지금의 작문력을 비교해 본다.

미국에 오고나서 한국어로 된 책들을 읽을 기회가 사라졌다. 인터넷이나 읽는 정도에 그친다. 2007년과 지금을 비교해 보아도 그 때에 지금의 내 표현력이 미치지 못함을 느낀다.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고 표현이 뭔가 어색하고 글쓰기가 힘들다. 내 생각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이전의 나는 퇴고를 한 기억이 거의 없다. 지금은 수정에 수정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가 없다.

 

하지만 미국에 오기 전보다 지금이 보다 내면적인 완성도가 깊어졌다. 아무래도 생활과 학업에서 많이 힘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영어를 많이 읽다보니 영어 문장 속에 담긴 미국적인 사고방식이 배여드는 것을 느낀다. 영어는 보다 논리적이고 직접적이다. 영어는 애매모호한 사변성을 싫어한다. 그렇기에 나도 영향을 받아 미려하고 감성이 풍부한 표현보다는 보다 정확한 표현, 오해를 줄이는 표현을 추구하게 된다.

 

난 언젠가 글쓰기에 내 많은 부분을 바치려고 한다. 내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때와 가장 몰입하는 순간이 시간이 갈 수록 글을 쓰는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글에 구현해 낼 삶에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예전에 소설쓰기를 접었던 이유와 같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할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내 한글 어휘력과 표현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늦은 것은 아닐까. 앞으로 나이를 더 먹은 후에 과연 지금 쓰는 것보다 나은 글을 선보일 수 있을까 걱정이 든다.

 

하지만 아직은 글보다 내 삶을 즐기는 것을 더 사랑하는 것 같고 난 내 본능에 충실할 따름이다.

2009. 2. 

p.s. 과거의 글은 현재의 생각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