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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보는 한국

한국인들이 출세에 집착하는 이유

한국식 의사 결정체계의 문제점

 

사례 #1. 미국에서 오래 공부하다 한국에 들어간 A는 학교에서 나이 많은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미국에서 익숙해진 스타일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마주치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노교수님도 그의 시선을 느끼고 조용히 웃으면서 다가왔다. A, 교수님도 미국에서 유학하셨기에 스마일 문화에 익숙한가보다라고 생각했다. A에게로 다가온 교수님, 나지막히 한 마디 했다. “눈 깔아.”

 

상명하복의 전통이 너무나 강하게 남아있는 한국, 권위주의적인 윤리관과 사상이 살아있는 한국문화는 개개인이 자율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큰 장벽이 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의견은 최대한 차별없이 동등하게 다루어져야 하는데 나이와 서열에 따라, 또는 직위나 직함에 따라 다르게 다루어진다는 것이 한국에 진정한 개인주의 문화와 합리적인 의사 결정체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사례 #2.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몇몇 나이만 먹은 어른들은 직위가 낮은 어린 사람들에게 초면에도 반말에 명령조로 찍찍 이야기하는 것을 본다. 단순 서비스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왜 초면에 반말을 할까.

 

 

짬밥은 괜히 먹는게 아니다. 세상을 괜히 일년 더 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흔히 듣는다. 그러나 나이 더먹은 것을 자신의 발언권을 높이는 데 이용하는 것은 결코 전세계 보편적인 문화 현상이 아니다.

 

많은 이들의 짐작과 달리 유교가 태어난 이웃 중국만 해도 존댓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이 먹은 사람에 대해 어떻게 대하냐고 물으니까 나이 먹은 만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지혜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젊은이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존중하려고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개의 경우 그들의 의견이 올바를지라도 그들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고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조언을 고려하되 결국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이 말이 거의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나라와 민족이 어른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것이 인류가 태고적부터 경험적으로 터득한 지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후세로 전수하고 축적하는 데 보탬이 된 바람직한 태도라는 것에 아무런 이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이 후세의 조건없는 무비판적인 수용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지혜를 분석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것과 장단점을 분석하여 현실에 맞게 슬기롭게 변용하는 것 중에서 무엇이 더 바람직하겠는가. 아무리 훌륭한 지혜의 가르침을 받았을지라도 스스로 해석하는 과정이 생략되면 현실에 올바른 적용이 이루어질 수 없다.

 

경험자의 의견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의견보다 대부분 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또한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예를 들어 인습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권위자의 의견일지라도 때로는 초심자의 눈에도 의심이 갈 때가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질문하고 반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문화 안에서는 언제나 주입식 학습만이 존재하고 반론이 존재하지 못한다. 토론은 무슨 토론이 있겠는가. 침묵은 금이고 의견을 내는 것을 가볍게 보는 문화가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아래에 있는 입장에서는 윗사람의 의견을 참고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조건 수용하고 저항없이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어른들에게 모르는 것을 질문하고 반대되는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에 대해 겁을 내는 문화 속에서는 개인주의가 살아있는 자율적인 문화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까라면 까,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는 가르침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나올 수 없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만 자라나게 되면 권위주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그러면 마치 한국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수많은 문명권에서 온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서 개인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유독 심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엄격한 권위주의와 상명하복의 세례는 학교에서 시작된다. 아무것도 모르고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몇몇 선생님들로부터 단정지어진 학생들은 하늘같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교육의 이름으로 공인된 구타나 인격훼손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부터 한국인은 윗사람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으면 사회 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할 덕목 하나를 깨닫게 된 것이다.

 

수업 시간에 질문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이해가 안가거나 의문이 가더라도 그저 받아 적기만 한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못하고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는 문화는 학생들에게 친절하기 보다 권위를 앞세우는 교수 사회의 전통에서 내려오지 않았겠는가. 수업료를 내고도 자신의 돈을 받는 이에게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 그러면서도 쥐죽은 듯이 꿈쩍하지도 못하는 모습. 이를 노예 근성과 비슷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 많은게 대수일까? 나이가 벼슬일 수 있을까? 선임자나 선배에 대해 공경과 존중을 보이는 것은, 배워야 할 것이 많은 후임자와 후배로서 가져야할 자세다. 그러나 나이 자체를 무기로 삼고 불합리한 것을 강요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예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스스로 가져야 할 주인의식을 버리고 권위에 저항하지 못하는 노예 근성일 뿐이다.

 

군대에 들어가 위계질서와 상명하복만이 정답인 집단에서 사회에 대한 가치관을 재형성하게 되면, 사회를 살아갈 때, 윗사람 눈치에 철저하고 집단에서 열외하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신념을 뼈속 깊이 새기게 되고, 집단주의와 권위주의의 화신으로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 개인적인 태도는 다루기 귀찮은 것으로 여기고 만다.

 

학교와 군대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스스로 남자답다 여기는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거친 권위주의로 사고관을 굳히고 만다. 이런 구성원들 속에서 만들어져온 한국 사회는 권위가 너무 강해서 질문과 반론을 하극상이라 취급하고 용납하지 않는다.

 

위와 아래를 철저히 구분하고 아래에서는 아무 말 못하고 위에서 아래로 의견이 내려오는 소통 체계만을 당연시 여기는, 상명하복에 철저한 한국 문화, 한국적 의사 결정 시스템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선생님이 결정한 사항, 목사님이 결정한 사항, 간부가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감히 질문조차 하지 못한다. 속으로 이상하다 싶어도 겉으로 내색하기 조차 두려워한다. 잘못이다 싶어도 혼자 섣불리 나서지 못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윗 사람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수 밖에 없고 다양한 의견 개진 같은 것이 살아있을 수 없다.

 

 

#사례 3. A기업의 대리가 B기업의 간부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A기업에 대해 안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는다. A대리가 A기업의 프로젝트에 대해 의문이 있으면 자기와 이야기해보자고 한다. 그랬더니 B기업의 차장은 난 이미 당신네 기업 부장과 이야기를 했습니다라며 어딜 감히하는 표정을 짓는다. B기업의 차장은 사람과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직급과 의논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자기 회사의 부하도 아니고 다른 회사의 직원임에도 말이다. 차장의 표정은 마치 이런 듯 했다. ‘억울하면 출세해!’

 

#사례 4. 회계사 C가 첫 감사하는 날에 복사기만 열심히 돌리고 있다. 주위를 보니 D법인의 아르바이트 생이 자기와 같이 문서를 복사하고 있다. C아 이런.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증을 딴 내가 저 알바생과 다를 바가 없구나. 난 카피 보이라며 푸념한다. CPA로서 뭔가 다른 대접을 기대했지만 그것이 안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알바생과 같은 일을 해도 알바생과 입장이 같을 수 없다. 다른 월급을 받고 다른 경력을 쌓아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일에 대해 불평을 했다. 아마도 알바생과 같은 일을 하는 상황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내가 누군데 저 알바와 같은 일을 해야한다니!’

 

#사례 5. 대학생 D는 학회에 나가서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D는 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았다. 한 선배의 생각과는 다른 관점이었다. 그러자 그 선배는 너 무슨무슨 책 읽어 봤어? 너 뭐뭐 공부해 봤어? 공부해 보지도 않고서 어딜 감히하는 것이었다. 선배는 공부가 아직 짧은 후배와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나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상황이라고 여기는 듯 했다. 선배의 마음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억울하면 공부하고 내 수준까지 와바. 그때 인정해 줄께. 지금 네까짓께 피식!.’

 

다른 사람들을 학벌이나 나이나 경력이나 직급이나 그외 여러가지 자체 필터링을 통해 타인을 분별하고 자기 기준에 못미칠 경우, ‘난 댁따위가 나댈 상대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깔보는 인간 수양이 덜된 사람들이 한국에는 많다. 아마도 위 사례와 같은 일들에서 상처를 받고 좌절하고 억울해서라도 출세욕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한국에는 많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좋은 점은 나이나 직함같은 것 때문에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최종 결정은 보스의 몫이고 선임자가 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보스에게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본다거나 단지 서열이나 직급이 한참 아래라고 의견을 무시하고 이런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미국에서는 상급자로 진급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미국에서는 상급자들이 보다 많은 시간을 일하기 때문에 사생활을 위해 진급을 피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윗 사람의 의견은 대개의 경우 정답에 가까울 때가 많다. 위에서 말했듯이, 내려오는 말마따나 짬밥은 괜히 먹는 것이 아니니까말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대개의 경우지 전부의 경우는 아니다. 가끔은 책임지기를 회피하는 다수의 침묵 속에서 혼자의 독단과 독선이 엄청난 결과를 빚어낼 때도 있다. 그리고 또한 일부 권위자만의 시각이 조직의 의사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 의견의 사각지대는 반드시 나타난다. 위계질서가 너무 강한 곳은 소수 의견을 조직의 질서를 저해하는 것으로 여기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속에서는 소신있는 내부 고발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서 조직 자체가 부패하기도 쉽다.

 

이런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의사를 조직하고 결정하는 능력에 있어 취약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 스스로 고민하고 찾아보지 않고 위에서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어떤 좋은 생각을 갖게 되었을 지라도 입 밖으로 내기조차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면 뭐하러 생각을 하겠는가. 그저 위만 쳐다 보게 될 뿐이다. 자주적인 자세란 실익없는 그저 공허한 말장난이 될 뿐이다. 그저 남들하는 것 눈치보면서 그대로 따라가야 철들었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말이다.

 

이러한 속에서의 결과는 개개인의 주체의식의 결여로 종종 나타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말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참 싫어하는 말이다. 이 말이야 말로 뿌리깊은 노예근성과 그에 기반한 주체성 박약을 드러낸다. 윗물이 맑지 않다고 아랫물이 스스로의 더러움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의식이 다른 이의 의식에 종속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꼴이다. 다시 말해 본인의 윤리관과 판단에 있어 주인의식,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그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윤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도 하는데 나같은 하찮은 아랫물이야 아무래도 상관없겠지하는 자세 아니겠는가. 자신을 스스로 하찮게 여기는 태도다. 그러나 윗 사람의 시선에 예민하고 자기 주장을 소신껏 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윗물 아랫물 이야기가 끊일 수 없다.

 

나이나 직함, 계급에 민감한 권위주의 문화 속에서 한국 사람들을 낯선 이를 초면에 대할 때 긴장하기 쉽다. 내가 상대방보다 위인가 아래인가를 설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이이건 서열이건, 짬밥이건 말이다. 누구는 나이로 서열을 정하자고 하고 누구는 짬밥으로 서열을 정하자고 하면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아무튼 간에 한국인의 초반 대면에는 상대에게 눌리지 않으려는 강박증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초면에 상대와 친화적인 자세를 보이려고 하기보다 기싸움을 벌인다. ‘네가 날 무시할 수 있나 보자. 네까짓게 뭐냐.’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상대방에게 친절은 종종 얕잡아보일 수 있는 태도로 여겨진다. 이런 사회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권위높은 직함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낯선 타인에게 경계심이 강한 태도를 보이고 초면에 기싸움을 벌이는 일은 전통깊은 서열의식이 빚은 현상이 아닐까.

 

한국식 예의에는 권위주의적인 요소가 많다. 앞서 말한 사례 1을 봐도 그렇다. 미국에서 오래 머물다 한국에 들어간 어느 젊은 교수가 한국에서 나이 먹은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미국에서 익숙해진 대로 눈을 마주치고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나이먹은 교수가 다가와서 하는 말이 새파란 것이 어디 감히 야려라고 하더란다. 외국에서는 눈을 마주치며 인사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깔아야 한다.

 

한국에서의 예의범절의 문화는 다른 나라와 달리 약자에 대한 친절, 상호 배려나 이해의 문화보다는 사람 위에 사람서고 사람 밑에 사람있는 서열주의의 문화가 베이스라는 것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앞서 사례 2 3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이런 가운데서 사람으로 제대로 대접받기 위해 높은 권위를 추구하려는 욕망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유독 직업에 자에 집착하는 것도, 뱃지를 권위의 상징으로 강력하게 추구하는 것도 말이다.

 

생각해 보자. 출세에 대해 강박증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가 말이다. 단지 돈을 많이 벌려는 동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겉포장으로 칠해진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아니라고 솔직하게 인정한다면 말이다. 기성의 권위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자세를 가졌다거나 권위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권위를 위해 출세를 추구한다면 이는 더 이해하기 어렵다. 기성의 권위주의는 부정하면서도 스스로는 서열을 높이려고 애쓰고 권위를 가지려고 집착하는 모습은 뭔가 자기 모순적인 태도가 아니겠는가. 자기보다 높은 것은 부정하고 자기는 남들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기만이 존엄하다는 자기애적인 성격장애로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권위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면서도 권위를 숭앙하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권위에 대해 자기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모습을 갖지 않는 한국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사회 문화가 나이부터 비롯해서 여러가지 서열을 지나치게 따지고 권위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자기 방어기제가 남의 권위는 부수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출세에 대한 강박증을 갖는 이유는 바로 다른 이들의 권위주의에 상처를 받았고 피해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